2009. 11. 29. 03:38 애니
새삼 떠오르는 '리얼' 로봇물(②)
2. 합신전대 메칸더로보(合身戰隊メカンダㅡロボ·1977)
국제물리비밀연구소 소장인 시키지마 박사는 어느날 가니메데 별에서 온 캡슐을 목격한다. 캡슐 안에서 나온 건 그 별에서 탈출한 왕자 지미 오리온.
그는 우주 장악을 노리는 콩키스터 군단의 황제 헤드론이 다음 목표로 지구를 노린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에 시키지마 박사는 아들 류스케, 지미 오리온, 코지로를 파일럿으로 하는 메칸더 로보를 만들고 적의 습격에 대비한다.
뒤이어 지구를 침공한 콩키스터 군단은 지구의 95%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일본인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시키지마 박사가 만든 기지 킹 다이아몬드와 메칸더 로보로 끝 모를 전투를 벌이는데….
리얼 로봇을 얘기하면서 왜 이 작품을 언급하는 거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듯 한데,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소수 정예가 강대한 악의 집단에 대항한다는 기본 얼개를 볼 때 분명 로봇 자체는 슈퍼 계열이지만 그 외의 설정들이 보여주는 리얼함 때문에 이 애니를 떠올렸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실제 있을 법한 설정을 극에 적극 도입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입니다(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주력 로봇인 메칸더에 '항속 거리', '탄약 보급' 등 밀리터리 요소를 부여한 것이죠.
또한 물자 보급을 함에 있어서 도달하기까지의 거리 및 시간 차를 염두에 두는 전술 운용, 후방 지원을 맡는 이름 없는 특공부대 등이 슈퍼 로봇 본연의 박력과 맞물리면서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합니다.
여기에 그전까지 '콤바트라 V'로 대변됐던, '존재할 수 없는 에너지와 방식으로 합체하는 슈퍼 로봇'들과 달리 온전히 하나의 형태로 완성돼 있는 메카에 조종선이 결합한다는(사실, 현란한 합체에 비해 모양새는 좀 빠집니다) 설정도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훨씬 리얼했죠.
거기다 메칸더의 선배 애니들 속 적의 기체는 한 회당 각기 다른 능력과 생김새를 갖고 있는, 나름 '특별한' 존재들이었지만 이 메칸더 로보의 적들은 '양산형'이었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의 자쿠처럼 말이죠.
콩키스터 군단이 자신들에게 반격을 가할 무기가 될 수 있는 지구의 원자력 에너지를 멸절시키기 위해 위성 궤도 상에서 자동 발사되도록 설치한 '오메가 미사일' 또한 이 애니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오메가 미사일은 지구 상에서 원자력이 탐지되면 그 즉시 발사돼 끝까지 따라가 파괴시킵니다. 한국판 주제가 가사처럼 '원자력 에너지의 힘이 솟는' 메칸더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엔진이 걸리면 오메가 미사일이 메칸더를 향해 발사되고, 짧게는 3분에서 길어야 5분이면 도달하는 오메가 미사일에 맞지 않기 위해 그 시간 내에 적을 없애고 엔진 기동을 멈춰야 한다는 긴박감이 매 회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타임 리미트는 울트라맨·가면라이더 류의 특촬·전대물에서는 흔했지만 로봇물로서는 굉장히 예외적인 패턴이었죠.
이처럼 메칸더 로보는 거대 로봇을 병기로 보는 개념의 시초인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기동전사 건담의 그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건담의 감독인 '학살자' 토미노 요시유키가 이 작품의 연출자 중 한 명이기도 했지만요.
그런 점에서 흔히 얘기하는 '리얼 로봇'으로서의 건담은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이런 과거의 작품들이 쌓아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담인데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로는 물론 '리얼 로봇으로서의 재미'도 있지만 주력 메카인 메칸더가 23화인가에서 '너무나 처참하게 파괴되던' 장면 때문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파일럿도, 로봇을 만든 과학자도 아닙니다. 시청자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그 로봇이 주인공이죠.
그런 주인공인 메칸더 로보가 콩키스터 군단의 사령관인 메두사가 이끌고 나타난 드래곤 드릴러에게 휘감겨 눈알이 빠지면서 사지가 절단나고 대파됩니다.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충격적인 신이죠.
더욱 놀라운 건 사령관 메두사가 콩키스터 군단에게 세뇌(라고 쓰고 개조라고 읽는다)된, 지미 오리온의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실 지구를 침공한 콩키스터 군단은 가니메데 별의 사람들을 사이보그로 강제 개조한 무리로 편성돼 있습니다. 그 별의 여왕이 바로 메두사였고 그녀는 메칸더의 파일럿 중 하나가 자기 아들이라는 걸 모른 채 죽음으로 몰고 가죠.
하지만 세뇌가 완전하지 않았던 터라 가끔 제정신을 찾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간간히 보여줬는데 드래곤 드릴러가 메칸더를 박살내자 드디어 해치웠다며 좋아하던 순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그간의 사정을 깨달은 메두사는 이대로 가다간 결국에는 아들을 죽이고 말게 된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눈물을 흘리며 지미를 구한 뒤 자폭을 택합니다.
이처럼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던 메칸더였지만 그 당시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콤바트라 V에 밀린 여타의 슈퍼 로봇물처럼 이 작품도 시청률 저조로 부진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게다가 완구 판매에서도 굉장한 성과를 거뒀던 콤바트라에 비해 이 메칸더는 완구로서의 메리트마저 별로였죠. 사실 '등짝에 비행선 하나 낑궈넣는 합체'가 그닥 매력적이지는 못했을 겁니다.
시청률은 떨어져도 완구 판매에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던 '강철 지그'의 선례를 답습하고 싶었던 걸까요. 메칸더의 메인 스폰서였던 블루마크는 쌓인 재고라도 팔아서 이문을 남기려고 메칸더의 합체 방식 변경을 요구합니다. 콤바트라처럼 각 부가 분리돼 있다가 결합하는 식으로요.
아무리 제작진이 자신들의 작품을 온전히 만들고 싶어도 그들은 돈을 대주는 스폰서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새로운 합체 시스템을 탑재한 메칸더를 등장시켜야 했던 제작진은 극단의 방법으로 기체 교체를 감행합니다. 원래는 없던 메칸더의 파괴 에피소드는 그래서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합체 시스템 변경은 기존에 만들어진 완구 재고 판매가 목적이었기에 메칸더의 디자인을 바꿀 수는 없었고 제작진은 궁여지책으로 상당히 괴상망측한 방식을 택합니다. 그냥 봐서는 분리될 것 같지 않은 디자인의 메칸더를 네 조각으로 나눈 뒤 그 조각들이 출동하면 합체하고 '물에 불리면 커지는 장난감'처럼 거대해져서 더 강해진 신 메칸더가 된다는 설정이었죠. 무슨 울트라맨도 아니고….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우습지도 않은 조잡함에 호응해줄리가 만무했고 완구의 꼬라지마저 이상했기에 제대로 팔리지도 못했습니다.
장사가 안 되던 블루마크는 경영난을 못 이기고 도산하기에 이릅니다. 게다가 메인 스폰서를 망하게 만든 애니메이션에 돈을 대겠다고 나서는 이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었기에 제작비 지원이 중단됐고 시청자들도 이 작품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예정보다 짧은 35화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저도 이 작품을 TV로 보다가 이 괴상한 설정이 등장하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뭐야, 저거" 이랬던 기억이 납니다. 오만 정이 뚝 떨어지더군요. 그래서일까요. 엔딩이 어떻게 됐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메칸더는 분명 범작의 수준을 상회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운이 많이 안 따라 준 경우라고 봐야겠죠.
뱀발 1 : 우리나라 방영 당시 제목은 '메칸더 V'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왜 저렇게 이상한 제목으로 바꾸는지 모르겠어요. 'Knight Rider'를 '전격 Z 작전'이라고 하지 않나 그냥 'Airwolf'를 '출동! 에어울프'라고 하지 않나…. 일본 사람들이 의미불명의 알파벳 붙이기를 좋아하는데 거기 영향을 받은 건지.
뱀발 2 : 국내판 주제가는 원판보다 훨씬 박력있고 좋죠. '천년여왕' TV판처럼 원곡보다 더 좋게 뽑아져나온 노래 중 하나입니다. 당시 애니메이션 주제가는 가수 김국환씨가 도맡았죠. 그 때 그 길로 계속 가셨으면 한국의 '미즈키 이치로'가 될 수도 있었으련만 동료 가수들과 주위의 멸시 때문에 그 길을 접으셨다고 하죠. 바로 '만화 따위'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요. 그 덕에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도 태권브이나 둘리 같은(작품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몇 개 안 되는 작품에만 목을 매고 있습니다.
두 편 정도 더 올리려고 했는데 이거 하나에 글이 이렇게 길어지네요. 나름 정리한건데…. 두 편으로 끝내려던 포스팅인데 한 편 더 작성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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